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쑹자오런 암살 사건 (문단 편집) === 쑹자오런 저격 === >"국민당이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면 두려울 것이 없다. 두려운 것은 그들이 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획득하려는 데 있다." >---- >위안스카이가 심복 양탁에게 한 말. 선거 이후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모두 베이징으로 모이게 되었다. 국민당 총리 [[쑨원]]은 쑹자오런을 국민당 이사장 대리로 임명하였다. 쑹자오런은 호남에서 출발하여 우한, 난징을 거쳐 상하이로 가면서도 유세를 하며 내각책임제 실시와 중의원에서 국무총리 선출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당시 임시 약법 체제는 의회에게 대총통 탄핵권을, 대총통에게는 의회 의결 거부권을 주는 등 내각 책임제와 대총통 중심제에서 상당히 갈팡질팡하고 있었고 국무원의 역할, 국무총리와 대총통의 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점 등의 한계가 있었다. 쑹자오런은 의회를 강화하여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려 한 것이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먼저 매수를 시도하여 상하이, 한커우, 난징 등에 사람을 파견해 의원들에게 여비와 교통비를 제공하는 한편 베이징에 도착한 의원들을 화류계, 기방, 요정에 초대하며 자기 편으로 포섭하려 했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는 [[왕징웨이]] 같은 인물은 이미 이때 위안스카이에게 매수되었다고 주장하며 비난한다.] 쑹자오런에게도 은행 수표장을 보내 매수하려 했지만 쑹자오런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이 총리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을 놔둘 수 없다고 여겨 국무총리 자오빙쥔에게 쑹자오런을 제거하라고 지시하였다. 3월 20일 오전 10시 40분, 호령철도 상하이역에서 쑹자오런은 동지들의 환송을 받으며 베이징으로 떠나는 기차에 탑승하려고 하고 있었다. [[황싱]], [[랴오중카이]] 등의 동지들이 배웅하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10여명의 의원 당선자들이 같이 있었다. 그러나 10시 45분, 쑹자오런이 개찰구에서 역원에게 기차표를 내미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 놀란 황싱 등이 총성에 사방을 둘러보고 있을때 총알이 쑹자오런의 복부에 맞아 쑹자오런이 "맞았다!"라고 외치며 배를 잡고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이어 2발이 황싱과 랴오중카이를 노리고 각각 발사되었으나 빗나갔다. 총알을 발사한 검은 군복 차림의 괴한은 인파를 헤치고 달아났다. 쑹자오런은 비틀거리며 역의 철제의자까지 걸어갔으나 더 이상 힘이 없어 걷지 못했다. 황싱 등 동지들이 황급히 쑹자오런을 자동차에 실어 호령병원으로 이송했다. 12시 반, 병원에서 응급수술로 창자에 박힌 탄환을 빼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총탄이 간을 스치고 복부로 들어가 소장을 찢어놓았기 때문에 출혈이 심해 쑹자오런의 용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3월 21일 새벽에 깨어난 쑹자오런은 자신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위안스카이에게 보내는 전보를 작성하게 했다. ||지금 나라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고 국민들의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데 갑자기 떠나자니 유감이 많습니다. 총통께서 성심을 다하고 공정한 도리를 펼쳐 민권을 보장하기 바랍니다. 국회로 하여금 확고부동한 헌법을 만들게 한다면 저는 죽는다 해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3월 21일 오후 1시에 다시 개복수술을 하여 창자를 봉합했지만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사건 배후인 위안스카이는 자신이 배후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 강서도독 민정장에게 범인의 수배령을 내리라고 지시하는 한편 3월 21일 위로전문을 보내왔다. ||상하이의 쑹자오런 선생, 로이터 통신에 의하면 귀하가 폭도에게 피습되어 부상을 입으셨다 하니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얼마 후에 귀하의 전보를 받고서야 상세한 정황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민국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찾기 어렵습니다. 귀하는 학식이 뛰어나고 일의 시기를 잘 알기에 많은 사람들이 귀하를 추앙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의 눈이 지켜보는 장소에서 그와 같은 암살을 꾀하는 자가 있다 하니 법치국가에서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입니까. 원컨대 하늘이 도우셔서 하루바삐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실망의 말을 하지 말고 비관에 빠지기 말기를 바랍니다. 여러 관리들에게 명하여 큰 상을 내걸고 반드시 범인을 잡을 것입니다.|| 죽음이 임박하자 쑹자오런은 유언을 남겼다. >"남북의 화해를 위해 베이징으로 가서 대동단결하여 외환에 대비하려 했는데 이런 일을 당하다니..." 머리맡의 [[황싱]]과 [[위유런]]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남북화해의 내 참뜻이 오해받는 일 없도록 해주시오. 그것마저 암살당해선 곤란하오." 이후 자꾸 의식을 잃던 쑹자오런은 3월 22일 오전 4시 47분에 평온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사망했다. 불과 만 31세의 창창한 나이었다. 임종에 참여했던 대륙낭인 [[기타 잇키]]는 당시 상황을 자신의 저작인 《중국혁명외사》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피를 누르며 위유런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이런 말을 남겼다. "남북통일은 내가 평소 뜻하던 바이다. 여러 벗들은 부디 작은 일로 국가를 그르치지 말라." 그의 죽음은 혁명당의 뇌수를 깨버린 것이었다. 황싱은 관을 부여잡고 애끓는 소리로 울었다. 뒤늦게 도착한 탄런핑이 사자후를 토하자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이때 황싱과 위유런이 쑹자오런의 시신 위에 엎드려 통곡했고 천치메이도 통곡하면서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일체가 허무야!" 이후 동지들은 쑹자오런의 시신에 정장을 입혀 역사에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었다. 이후 쑹자오런의 유해는 현재 상하이의 송공공원에 위치한 바오산에 안치되었다. 묘비명은 위유런이 썼다. ||선생의 죽음은 천하가 슬퍼할 일이다. 선생의 행적은 천하가 아는 바와 같다. 내가 다시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직필을 할까. 직필은 사람을 죽인다. 곡필을 할까. 곡필은 하늘을 죽인다. 구천의 눈물은 천하의 분노이고 늙은 벗의 붓은 적의 쇠와 같은 증거, 이 모두를 하늘에 새겨 훗날 훌륭한 사가를 다스린다. 하나하나 가슴에 새기고, 하나하나 천지에 물어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